참수행을 만나 스님의 설법을 듣는 내용 중 각자 마음의 모습대로 삶을 살아간다는 말씀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어렵게 일을 만들어 풀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분별력을 발휘하여 쉽게 해결해 나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서 ‘왜 나에겐 저런 지혜가 없을까?’ 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지혜를 쌓는다는 책은 저의 상황 상황에 적용할 수 없는 단편적인 내용뿐이었고,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는 마음을 내려놓으라고만 하지 어떻게 해야 다스릴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나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내 성격과 습성은 어떻게 형성된 것이고 바꿔 나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어디에서도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참수행에서는 합리적이며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영원하고 영구하게 윤회하는 과정에서 쌓아 놓은 선과 악이 마음의 모습으로 발휘되며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한생의 생각으로 자신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마음속 악을 소멸하지 않는다면 현세에 그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도 육도윤회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영체일 뿐이라는 말씀에 윤회하는 보잘것없는 저 자신을 보며 숙연해졌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내가 만든 것이라는 말씀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참수행을 정진하며 자신을 겸허하고 겸손한 자세로 바라보게 되면서 결국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자신의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만이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 마음의 모습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성장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막고 있었구나.’
제 마음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동물의 성격과 습성에서 온 것이고, 동물의 성격과 습성을 사람의 성품과 품성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그 삶이라는 것은 보잘것없으며, 일반인들이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을 아무리 한다 해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삶의 기준이 없으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생의 기준이 아닌 영의 세계의 기준...
동물이 삶의 기준이 있을까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삶의 기준을 모른 채 불행 · 고통을 선택하며 번뇌 망상의 삶을 살아간다면 동물의 삶과 무엇이 다를까요..
내 마음의 모습대로 삶을 살아갈 것인지, 그 모습을 찾아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실제 사람의 단계로 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고 몫인 듯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나를 성장시켜 윤회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삶을 성장시키고자 노력하는 분들과 함께 도반이 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도의 참수행인에게 배움으로써 참길을 찾고 인위적인 노력과 병행하여 열심히 수행을 하게 된다면 참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초기 수행인들은 깊이 인식하기 바랍니다.